[9월 두 번째 이야기] [기고] 꼭! 다시 오리라 지리산 - '지리산과 빨치산' 역사기행을 다녀와서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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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다시 오리라 지리산
- '지리산과 빨치산' 역사기행을 다녀와서
대구결집 교육위원 손호만
[편집자 주] : 노동해방을 위한 좌파활동가 대구결집(이하 대구결집)은 지난 8월 31일 구례 10.19연구회 신강 대표와 함께 '지리산과 빨치산'을 주제로 역사기행 사업을 진행했다. 대구결집 손호만 교육위원의 기고글을 통해, 역사기행이 1946년 9월 총파업, 10월 항쟁, 1948년 10월 여순항쟁부터 빨치산 투쟁의 역사를 강연과 기행방식으로 들여다보며, 항쟁의 정신과 역사적 의미를 기억하고 마음을 나누는 인상 깊은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국결집 9월 소식지 두 번째 이야기로 손호만 교육위원의 기고글을 소개한다.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항쟁', 신강 대표의 강연 모습.>
조금이라도 더 볼 새라 새벽부터 서둘러왔건만 끝내 대구로 돌아서야 하는 발걸음엔 아쉬움이 진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듯 지리산을 헤집으며 가고 싶은 곳이 많았는데 벌써 하산이라니, 짧은 하루해가 야속타. 다음에 다시 올 땐 반드시 1박 2일! 아니 그 이상의 일정으로 오리라...
처음 지리산 답사를 신청한 회원은 12명이었다. 하지만 우리네 일정은 언제나 변화무쌍, 갑자기 일정변경이 생겼다며 4명이 빠졌다. 8명이 봉고차 두 대로 나누어 타니 ‘쾌적한 여행’이 되었다. 평소보다 빨리 잠을 깨서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말이다. 고속도로 먼 길을 달려 처음 도착한 곳은 전남 구례읍에 있는 구례센터였다. ‘해설사’ 신강 동지가 환한 얼굴로 맞아주었다. 하지만 그는 만남의 정을 나눌 틈도 없이 교육장으로 안내하더니 곧바로 강의를 시작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나에게 굳이 할 필요도 없다. 왜냐면 강의에 돌입하자마자 나는 이 강의가 어떠리라는 걸 금방 직감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답사 전체에서 뽑아야할 ‘본전’을 이 강의 하나로 다 뽑았다.
강의의 하이라이트는 ‘빨치산 탄생’에 관한 부분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지리산에서 빨치산투쟁이 탄생하게 된 것은 바로 여순항쟁 때문이다. 여순항쟁이 왜 일어났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봉기군이 작성한 ‘애국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글과, ‘여수인민대회 『결의안 6개항』’이었다. 친일파로 변절했던 민족주의자들과는 달리 끝까지 투쟁했던 좌파(사회주의)가 항일투쟁을 주도했으며. 이 때문에 해방 후 압도적 다수(국민의 77%)가 좌파를 지지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러시아혁명과 소련이었다고 한다. 이점을 알지 못하고서 결코 ‘지리산투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기쁨 두배’가 되었다.
두 번째로 내 마음을 움직였던 부분은 빨치산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소개였다. 한 분씩 소개될 때마다 저토록 뛰어난 일을 하시던 분이 왜 모든 걸 던져버리고 ‘산사람’이 된 걸까 생각하게 했다. 또 마을에서 함께 살다가 그냥 함께 산사람이 된 경우도 많았는데, 그들 또한 가족 그리고 연인들과의 가슴 아픈 사연이 가득했다. 듣는 내내 한숨과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몰라도 너무 모른 채 살아온 내가 부끄럽고 미안했다. 살아남은 어떤 사람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너무도 사랑했기에 미안하다’는 말을 할 때는 울컥했다. 산자여 따르라는 광주의 5월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세 번째로 여순항쟁이라는 명칭이 잘못된 것이란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동안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사용해온 명칭이 진실을 왜곡하는 것이었다니... 가만히 듣고 보니 10월 19일, 14연대 병사들이 여수에서 처음 봉기를 시작한 이후 항쟁은 순천뿐만 아니라 구례, 보성, 벌교, 광양, 하동 등 전남 동부지역 전체로 확산되었는데도 우리는 그 동안 ‘여순항쟁’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 정확한 이름으로 불려 지길 기대해 본다.
<빨치산투쟁 지휘부의 은신처로 사용된 바위굴의 모습.>
강의가 끝난 후 유적지 답사가 시작되었다. 봉고에 몸을 싣고 지리산의 문수골로 향했다. 항쟁 참가대오가 빨치산투쟁을 위해 처음 집결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도착한 곳은 문수간이학교. 아주 작은 학교였다. 이곳에서 어떻게 그 많은 인원이 생활을 했는지 모르겠다.
<빨치산 투쟁 대오가 처음 집결했던 지리산 문수골 문수간이학교의 모습.>
그 다음으로는 계곡을 건너 바위굴비트로 향했다. 그곳은 지휘부가 있던 곳이었다. 바위동굴이 든든하게 은신처를 제공해주었다. 지휘부는 이곳에서 계곡 건너편 문수학교에 있는 병사들과 은밀하게 수신호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빗점골. 하지만 운이 없게도 ‘지리산 감시원’들에게 입구에서부터 막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너무도 아쉬웠다. 이현상 선생님을 생각하며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 유명한 화개장터로 가서 점심식사와 막걸리 한잔을 걸친 후 백운산의 한재로 갔다. 그곳은 정운창 열사(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주인공)와 정원모 형제가 묻힌 곳이다. 처음에는 대체 묘가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어 헤맸다. 하지만 잠시 후 땅바닥에서 흙을 걷어내니 조금씩 묘비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익들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선 지금도 숨길 수밖에 없다고 한다. 8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익의 행패는 현재진행형이다. 울컥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선배님들께 술을 한잔씩 올린 후 백운산비트로 향했다. 사령부와 함께 모든 병사들이 함께 지내던 곳. 돌확이 그 자리를 증명하고 있었다. 주변을 서서히 둘러보니 선배님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연병장바위와 그 옆의 비석이었다.
<역사 앞에 정직했던 빨치산 혁명가 정운창, 정원모 열사가 묻힌 백운산 한재. 묘비 앞에서 예를 올리는 모습.>
답사를 하는 내내 마음이 착찹하다. 이 길은 끝내 우리가 가야 할 길인데, 만약 지금 당장 무장투쟁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과연 나는 ‘산사람’이 될 수 있을까? 기꺼이 입산하고 또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빨치산’들은 정말 보통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어떻게 초인적인 사람이 되었을까. 하지만 생각을 하나 둘 정리해 나가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빨치산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선배들이 써나간 그 역사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지만 틀림 없이 그것은 혼자서가 아닌 단결된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그렇다면 그분들은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으리라. 단지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더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람들이었기에, 그분들은 오히려 민중들의 삶 그리고 민중들의 생활공간과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리라. 단지 남과 북에서 버려져, 그 세월이 하도 오래되다보니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로 인식되었을 뿐이리라.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빨치산의 선배들께 더욱 미안한 마음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선생님은 물론, 당대 ‘최고의 천재’라고 일컬어지던 철학자 박치우, 훈민정음 해례본을 처음 발굴했다는 김태준, 평양 최고재판소 여성판사였던 박진홍,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꼿꼿했던 박종하, 이영회, 하준수, 김종석, 김지회, 홍순석 ... 등등등. 빨치산 모든 분들께 머리를 조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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